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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교효문화선양회>백교문학상 수상작품 감상

강산들꽃 2021. 5. 2. 16:22

백교문학상 수상작품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작품

sogye  0건  76회 19-10-02 18:20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작>

가까운 오지奧地

김형미

 

내게는 오지奧地가 있다

유년의 걸음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휘파람 같은 가까운 오지가 있다

무디고 과묵한 영토, 무표정으로 일관한 깊이는

눈망울로만 우는 소의 눈처럼 깊었다

등 기슭에 자주 피던 소금 꽃

혹여, 그 꽃그늘에 얼굴을 묻어볼까 하여

살짝 다가가 기웃거리다

돌아서곤 했다

적막한 꿈으로 둘러싸인 바깥

병마로 허리가 기운 후, 헐거워진

틈으로 새어나온 뒤를 엿볼 수 있었다

쓸쓸히 고립된 채 갈라진 등껍질

여기저기 웃자란 가시와 엉겅퀴

아버지의 등은

망설임 없는 사선을 가졌다

넘어지려는 흙 담 귀퉁이에

기대놓은 오래된 굄목처럼

인생의 지워진 문패가 되어버린 지금

먼 길 돌아 와 기운 등에 얼굴을 묻는다

팽팽한 생의 한 끝이

오목가슴을 찌른다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작>

사막과 꽃잎

이강하

 

당신 내부는 버석거리는 사막

어쩌더 별 무리를 붙잡고 온몸 일으켰으나

걸음은 매순간 엿가락처럼 휘어져

꽃잎 우네

산을 사랑했으나 지금은 방 한 칸이 전부

큰 산을 보려고 해도 당신 뼈 속엔 건조한 바람만 가득

미친 듯이 자해를 꿈꾸는 늪처럼

신이 내린 임무치고는 너무 가혹해

꽃잎 우네

계절 따라 맛있는 음식, 자식 효도에 행복할 거라고

큰소리치던 도시의 똑똑한 아들은 어디로 갔나

마당이 없으면 어때요? 아파트에서 아리랑도 부르며

함께 살자던 딸은 또 어디로? 처신을 잘못하면

방 한 칸 자유도 날아간다 하시며 오로지 한 집만 고집한

그런 당신을 이해 못한 혈맥들

꽃잎 우네

 

큰 집이 큰 도시가 두려워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내 밖 문화를 멀리 한다네

지금은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 뿐

어머니- 우리 어머니,

꽃잎 우네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작>

               달

 

                          강지혜

 

어머니 손목에

달 하나 떠 있다

검버섯 핀 자리에 볼록,

언제부터인가 부풀어 오른 달

검푸른 뿌리는

안간힘으로 달을 그러쥐고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어머니는 온몸에 달빛이 번질 때마다

바튼 소리로 앓아 눕곤 하신다

자식들을 아버지 몫까지 기르시느라

손 등뼈가 굽어가는 줄 모르고

고달픈 시간들이 쌓이고 쌓인

둥근 혹 한 덩어리

돌로 굳어버리고만

눈물 얼룩진 저 달뭉치

검은 멍울로 돋아나있는 달

저 무거운 삶을

이젠 내려 드리고 싶다

달빛이 사그라들면

어머니 가슴에는

환한 햇빛이 번질 것이다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작>

눈물겨운 나비 꽃신

김순덕

 

신발가게에서 하얀 백고무신을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신발 속에서 희미하게 살아난다. 그 은혜를 갚아드리지도 못하고 하늘로 가신 두 분 얼굴이… 고무신이라 하면 누구나 어린 시절이 떠오를 법도하다. 그중 나도 신발에 대한 추억이 있어 기억을 끄집어내 본다.

 

앞 냇가에 나갈 때는 언제나 어머니 아버지의 백고무신을 가지고 나간다. 뽀얗게 씻어다 놓아드릴 때마다 칭찬을 아끼시지도 않았지만 두 분 신발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내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좀 오래 신은 신발은 씻어도 절은 때가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럴 때는 작은 돌로 때를 문지르면 뽀얗게 새살처럼 본바탕이 살아난다.

새 신발처럼 깨끗한 어머니 코고무신은 예쁜 새 색시의 모습이고 펑퍼짐한 아버지의 신발은 새색시를 품어 안을 수 있는 널따란 가슴 같아서 참 보기 좋았다. 하얗게 새 신으로 변신시킨 아버지 어머니 신발. 흙으로 맥질한 섬돌 문지방 밑 댓돌위에다 나란히 올려놓고 햇살로 말려댄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우리 딸이 새 신발처럼 깨끗하게 씻어놓았구나” 하고 대견해하시며 싱글거리셨다.

햇살이 널어놓은 아지랑이가 마당 안으로 피어올라 너울대는 포근한 봄날, 어머니 아버지는 뽀얗게 씻어놓은 새 하얀 고무신을 신고 읍내 장으로 나가셨다.

읍내로 가면 뭐가 있을까? 열 살이 되도록 시내 구경을 못했으니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 오실 때마다 사다 주신 왕사탕과 줄에다 줄줄이 꿰어단 허연 나일론 과자? 아니면 금옥이가 신고 다니는 나비가 달린 꽃신? 내 궁금함은 읍내 장터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차비가 낭비될까봐 딸아이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읍내에 가면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어린 동심이 멍들까봐 못 데리고 다니셨을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크면 읍내 장터로 한바탕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옆집 금옥이가 신고 다니는 나비꼿신은 꼭 한 번 사 신어 볼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거무스름한 싸구려 고무신만 사다주시는 어머니가 때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나비꽃신 한 번 신어보고 싶은데” 라고 심통을 부리면 어머니는 나를 슬그머니 안아주시며 “지금은 그런 비싼 신발을 못 사주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사다주마.” 라고 약속을 남겨 주셨다. 그 형편이란 것이 도대체 언제쯤이면 나아지려는지 기약도 없는 어머니의 말뜻이 이해는 안 되지만 새겨 들으며 포기할 줄도 알았다. 질긴 신발을 사서 오래도록 신겨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는 읍내 장날이 되면 농작물이나 산나물을 채취하여 이고 지고 팔러 가신다.

‘아침에 읍내 장으로 나가셨으니 왕사탕이나 나일론 과자 중 어느 것 하나는 사오시겠지.’ 철부지 욕심은 염치를 몰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 아버지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안오셨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어 젖혔다. ‘아니 이게 뭐야! 꿈인가, 생시인가‘ 꽃이 다문다문 섞인 나비꽃신 한 켤레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지 뭔가. 그렇게 신어보고 싶었던 나비꽃신.

신발을 껴안고 방바닥을 딩굴어도 보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고.

세상이 다 내 것으로 보였다.

그날 밤 어설픈 잠자리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소근거리는 귓속말을 엿듣게 되었다. “자가 나비신이 저렇게도 신고 싶었나 보오. 신발을 가슴에 품고 잠든 것을 보니까.“

아버지의 흐뭇해하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요. 여보! 점심을 사먹지 않고 차비를 아껴서 자 신발을 사 오길 잘했어요. 배는 고팠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시는 말씀을 엿듣고 가슴이 울컥해졌다.

딸아이가 아무리 갖고 싶은 신발이지만 몇 십리 길을 짐을 이고 지고 걸어갔다 걸어온 먼 길을 점심도 거르시고 차비까지 아껴서 내 신발을 사 오신 것이다. 무엇으로 그 은혜를 보답해드릴까?

‘아껴 신어야지.‘ 가슴속으로 흐르는 부모님의 사랑이 벅차올라서 콧등이 시큰했다. 귀하게 사다주신 나비꽃신을 아껴서 신기로 다짐을 했다. 집에서는 헌 신발을 신고 학교 갈 때만 신는 나들이 신발이 되었다. 다시는 얻어 신을 수 없는 귀한 꽃신인 것 같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얼른 신발을 벗어서 깨끗하게 씻어 말렸다. 그리고 머리맡에다 깨끗한 종이를 펴놓고 꽃신을 올려두었다. 울긋불긋한 꽃신에서 나비 두 마리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이면 방안에서도 꽃신을 신어본다. 그런데 자주 씻는 바람에 아쉽게도 나비 한 마리가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나비 한 마리는 부활을 꿈꾸며 어디론가 훨훨 날아갔을 것이다.

발이 커져서 신발을 꼭 끼게 신어서인지 뒤발굽이에 물집이 생겼다. 더 이상 발이 자라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신발이 작아졌다. 그렇지만 꺾어 신으면서도 늘 새신 같이 아껴 신었다.

그날도 어머니 아버지 신발과 나비꽃신을 씻어 오려고 냇가로 나갔다. 장마가 진 뒤라 물살이 거칠었다. 하지만 안전하다 싶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신발을 씻기로 했다.

어머니 아버지 신발 옆에다 담가놓은 내 신발을 보니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진해졌다. 때가 절은 두 분 고무신은 더욱 희게 만들려고 돌로 문지르며 깨끗이 씻어서 돌에다 얹어 놓았다. 신발 속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뭉근한 미소를 보는 듯 했다.

물기를 빼는 동안 내 나비신발을 씻으려고 미리 물에 담가 놓은 신발을 건지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신발 한쪽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길로 뛰어들어 덥석 건져 낼 수가 없었다. 깊고 센 물살 앞에서 내눈물겨운 꽃신이 미련없이 나를 버리도 정처 없이 떠내려갔다. 다시는 내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먼 물길로.

발에다 신을 수 없는 한쪽 신발은 그날부터 내 가슴 속에서만 신어 보는 눈물겨운 꽃신이 되고 말았다.

나비꽃신의 추억 속엔 눈물이 담겨있다. 허기진 배를 허리띠로 졸라매고 사다주신 어머니 아버지의 허기진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다시는 못 오실 먼 곳으로 가셨지만 내 가슴속엔 아직도 눈물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나비 꽃신.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작>

물 흐르듯 내 마음도 흘러서

이옥경

 

2~3년 사이,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라는 상상이다. 처음에는 다시 눈을 뜰 수 없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두렵고 무서웠다. 오로지 혼자 겪어낼 수밖에 없는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그 순간에 닥쳐올 외로움과 미지의 사후死後세계에 대한 불안감은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삶은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도 준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해가면서 그 두려움과도 화해하게 된 것이다. 누구나 혼자서 그 길을 갔다. 또 혼자서 그 길을 간다. 갈 수밖에 없고, 갈 만한 길일 거라는 단순한 깨달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덕분에 이제는 잠을 통해 죽음을 연습한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다. 손때가 묻은 소소한 생활용품부터, 크게는 버리지 못한 욕심과 미움까지, 부끄럽게도 내 삶은 남길 것보다 정리할 것이 더 많다. 누군가의 손에 맡기게 될 그것들의 무게를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먼 길은 가뿐하게 떠나는 것이 좋을 터. 소중한 인연도 때로는 짐이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생각하다가, 아들에게 나는 어떤 부모일까도 생각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 어머니의 맹목에 가깝던 사랑을 기억한다. 나 또한 좋은 부모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하나뿐인 아들을 방임에 가깝게, 방목하듯 길렀으니 낙제점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남들보다 몇 배 더 잘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지도 않았으면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대우를 받고자 마음속 계산기를 두드리지는 않았는지. 좋은 어른 노릇도 못 했으면서 존경받기를 원하고, 염치없는 요구를 일삼지는 않았는지. 그 또한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뉴욕의 한 노숙자가 부모를 상대로 피해보상 청구소송을 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32살의 이 청년은 부모로부터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당해 12살 때 집을 나왔으며, 16살이 될 때까지 보호소를 전전해야 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부랑자 신세가 됐다면서 자신의 부모에게 20만 달러의 보상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효를 중시하는 우리네 정서로 보면 불효막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자식을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야 하는 부모의 도리를 놓고 생각해 보면,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그의 항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다할 때 자식 또한 자식의 도리를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다 어떤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또 대부분은 어떤 자식의 부모가 된다. 처음부터 나쁘게 태어난 자식이 있을 리 없다. 그는 다만 사랑받지 못했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부모는 열 자식을 품지만, 열 자식은 단 하나뿐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품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난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자식에게 서운한 것이 많다면 그 책임의 많은 부분 또한 부모인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자식에게는 훌륭한 부모였으되, 부모에게는 인색한 자식이 아니었는지. 자식 위한 일이라면 물심양면 아까운 것이 없어도 부모를 위한 일은 일일이 셈해보고 따져보며, 이리저리 미루거나 젖혀두면서 무관심과 무성의로 일관하지는 않았는지.

급변하는 시류時流는 베이비 부머 세대인 50대를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잘라 말한다. 서글퍼 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자고 나 자신을 격려한다. 계절이 바뀌면 꽃이피고 잎이 지듯, 세상이 달라졌으니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외로워질 뿐이다. 새 잎은,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고 긴 겨울을 이겨낸 빈 가지에서 움튼다. 많은 것을 비우고 내려놓은 용기가 필요하다.

시대가 변했다. 효의 덕목도 일방적인 희생과 복종에서 이해와 소통으로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효의 잣대도 달라져야 하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부모에 대한 자식의 마움도 진화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이 사람과 사람으로 더불어 조화롭게 상생할 때 우리의 삶도, 세상도 아름다워진다.

잠들기 전 나는 기도하듯 아들이 효도하기를 믿거나 바라거나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주었던 너무도 당연한 사랑 따위는 잊어버리자고 다짐한다. 타인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자고 다짐한다. 좋은 거울이 되자고 다짐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많은 다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자고 또 다짐한다. 가능하면 나는 아들과의 사이에 기차 레일 같은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사람인 나로, 사람인 아들을 인정하는 멋진 부모로 늙어가고 싶다.